서체와 물체 — Grip으로 조판한 표지
서체와 물체 — 전시 연계 토크의 표지. Typeface Grip으로 조판했다.

물체가 글자가 되는 순간에 관하여

글자는 원래 손끝에서 나왔다. 갈대를 깎아 만든 펜이든, 정으로 쳐낸 돌이든, 붓을 쥔 손의 각도든, 전통적인 서체는 어떤 도구가 어떤 재료 위에 남긴 흔적의 축적이었다. 캘리그래피와 기하학. 오랫동안 서체 디자인의 출발점은 이 두 갈래 중 하나였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다른 계열의 작업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손의 움직임도, 자와 컴퍼스도 아닌, 그냥 세상에 굴러다니는 물건에서 글자의 형태를 길어 올리는 사람들. 길에 떨어진 플라스틱 조각, 악기의 곡률, 전투기의 실루엣, 머리카락 한 올. 이들은 사물의 형태적 특성을 타이포그래피의 모티프로 끌어온다. 그래픽 디자인을 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떠올릴 법한 발상이지만, 막상 그것을 하나의 방법론으로 밀고 나간 사례를 모아 놓으면 이야기가 조금 달라진다. 단순한 시각적 차용이 아니다. 물질이 가진 고유한 속성과 문자가 가진 기능적 측면이 만나는 지점에서, 본문용 서체 디자인과는 전혀 다른 논리가 작동하기 시작한다.

이 글은 두 부분으로 나뉜다. 앞부분에서는 물리적 오브젝트가 글자의 형태 생성에 직접 개입한 몇 개의 사례를 살핀다. 뒷부분에서는 내가 직접 그린 서체 하나, ‘Grip’의 이야기를 한다. 결국 같은 질문의 앞뒷면이다. 물체는 어떻게 글자가 되는가.

1부. 서체와 물체

Paul Elliman, Found Font
폴 엘리먼(Paul Elliman, 영국, b.1961), Found Font, 1995–현재. 도시에서 주운 소형 오브젝트를 라틴 알파벳으로 분류한 상시 진행형 프로젝트.
Edward Fella, Fella Parts
에드워드 펠라(Edward Fella, 미국, b.1938), Fella Parts, 1993. 손으로 그린 의도적 불완전성으로 디지털의 정밀함에 맞선 드로잉.
Fiona Banner, DISARM
피오나 배너(Fiona Banner, 영국, b.1966), DISARM, 2024. 51대의 전투기가 편대로 단어를 쓰는 설치·회화 작업.
Otl Aicher, Allgäuer Sommer
오틀 아이셔(Otl Aicher, 독일, 1922–1991), Allgäuer Sommer. 포스터 1970년대·서체 원도 1958. 금관악기의 구조를 그래픽·레터폼으로 번역.
Joseph Churchward, Maori Typefaces
조셉 처치워드(Joseph Churchward, 사모아–뉴질랜드, 1932–2013), Maori Typefaces, 1983–2003. 마오리 전통 문양 코루(Koru)의 나선을 골격에 담은 서체군.
Jungmyung Lee, Spooky Hairy
이정명(Jungmyung Lee, Jung Lee Type Foundry), Spooky Hairy, 2017. 머리카락의 비선형적 움직임을 조형화한 서체.
Radim Pesko, Paabo
라딤 페슈코(Radim Pesko, 체코, b.1976), Paabo, 2020. 구체(球體)의 물성—완결성·탄성·볼륨—을 시각화한 서체.
Bold Decisions, Clip
마스 빌가르 & 아스게르 벤케 야콥센(Mads Wildgaard & Asger Behncke Jacobsen / Bold Decisions), Clip, 2017. 사무용 클립의 ‘고정·압착’을 구조 논리로 옮긴 서체.
1부에서 다루는 여덟 개의 사례 — 물질이 문자로 건너간 서로 다른 경로들.

폴 엘리만, 《Found Font》 — 도시가 흘린 것들

폴 엘리만(Paul Elliman, 1961년생)의 《Found Font》는 1995년에 시작되어 지금까지 이어지는 프로젝트다. 30년째 끝나지 않은 수집. 그는 도시 환경에서 발견되는 작은 인공물들을 모아 하나의 타이포그래피 시스템을 만들었다.

수집의 기준이 흥미롭다. 각 오브젝트는 입에 들어갈 정도로 작거나, 손에서 손으로 건네질 수 있는 크기여야 한다. 엘리만은 이 기준을 화폐의 크기에서 가져왔다고 말한다. 동전만 한 것들, 그러니까 사회 안에서 순환할 수 있는 것들. 버려졌으되 아직 손에서 손으로 옮겨 다닐 자격이 남아 있는 사물들이다.

이 컬렉션의 핵심은 형태학적 분류 체계에 있다. 수집된 물건들은 각자의 실루엣과 네거티브 스페이스를 기준으로 라틴 알파벳 스물여섯 자와의 유사성에 따라 다시 배열된다. 원형 고무링은 ‘O’의 자리로, ㄱ자로 꺾인 금속 부품은 ‘L’의 자리로 간다. 여기서 중요한 건 완벽한 일치가 아니라 시각적 연상과 근사치다. 정확히 O인 물건은 없다. 다만 O처럼 보이는 순간이 있을 뿐이다.

1990년대 중반은 매킨토시와 포스트스크립트가 대중화되며 DTP 혁명이 정점에 이르던 때였다. 조판이 그 어느 때보다 매끄럽고 편리해지던 시기에, 엘리만은 역설적으로 물리적 오브젝트로 되돌아갔다. 그가 흥미로운 건, 각 글리프가 실제 물질의 택스처와 무게를 그대로 지닌다는 점이다. 플라스틱 파편의 매끄러운 표면, 산화된 금속 조각, 탄성이 느껴지는 고무 부품. 이 물성이 개별 문자의 시각적 정체성을 결정한다. 글자가 추상적 기호가 아니라 저마다의 물리적 내력(來歷)을 갖게 되는 것이다. 문자 체계가 도시의 잔재로 다시 조립된다고 말해도 좋겠다.

에드워드 펠라, 《Fella Parts》 — 손으로 그린 불완전함

에드워드 펠라(Edward Fella, 1938년생)의 《Fella Parts》는 1993년 작업이다. 엘리만과는 정확히 반대편에 서 있다.

펠라는 상업 그래픽 디자이너로 30년을 일한 사람이다. 그 긴 세월 동안 눈에 쌓인 시각적 레퍼런스들을, 그는 해체적인 드로잉으로 다시 풀어낸다. 1990년대 초는 어도비 일러스트레이터와 포토샵이 디자인계를 장악하기 시작하던 무렵이다. 완벽한 디지털 그래픽이 표준이 되어 가던 그때, 펠라는 의도적인 불완전성과 수공예적 접근으로 맞섰다. 기계의 정밀함에 손의 떨림으로 답한 셈이다.

엘리만이 실제 물질을 주워 배열한다면, 펠라는 기억 속의 이미지를 손으로 그려 물질성을 시뮬레이션한다. 하나는 실재를 다루고, 하나는 재현을 다룬다. 같은 물질적 관심에서 출발하되 방향이 정반대다. 그의 글자에서 보이는 파편화된 스트로크와 불규칙한 웨이트는 산업 생산물의 마모와 파손을 떠올리게 한다. 손의 실수까지 끌어안은 아날로그의 질감. 완벽하지 않아서 물건처럼 보이는 글자들이다.

피오나 배너, 《DISARM》 — 51대의 전투기가 쓴 단어

피오나 배너(Fiona Banner, 1966년생)의 《DISARM》(2024)은 앞의 두 사람과 또 다른 층위의 물질을 다룬다.

그녀가 다루는 오브젝트는 전투기다. 51대의 전투기가 편대 비행 대형으로 ‘DISARM’이라는 단어를 쓴다. 개별 전투기 한 대는 하나의 픽셀이자 글리프를 이루는 최소 단위가 된다. 멀리서 보면 타이포그래피지만, 가까이서 보면 정밀한 군사 장비의 집합이다. 스케일과 맥락을 바꾸는 것만으로 의미가 뒤집힌다.

여기서 아이러니가 발생한다. 전쟁 기계들이 모여 ‘무장 해제’라는 단어를 쓴다. 물질의 폭력성과 기호의 평화주의가 하나의 비주얼 시스템 안에서 정면으로 충돌한다. 그 충돌이 의미의 층을 두껍게 만든다. 무엇으로 무엇을 말하는가. 이 작업은 그 질문을 대형(隊形)으로 던진다.

세 개의 ‘A’ — 같은 글자, 다른 물질

여기까지의 사례를 하나의 글자 위에 겹쳐 보면 이야기가 선명해진다. ‘A’ 하나면 충분하다.

조셉 처치워드의 ‘A’는 자연물의 성장 패턴을 따른다. 크로스바가 위로 살짝 휘어 오르는 모양은 식물이 빛을 향해 자라는 향광성을 닮았고, 전체적으로 생명력 있는 역동성을 지닌다. 피오나 배너의 ‘A’는 산업 제품의 기계적 정밀성을 반영한다. 날카로운 각과 직선은 전투기의 공기역학적 형태를 연상시키고, 차가운 금속성과 속도감을 전한다. 이정명의 ‘A’는 생체 물질의 유연함과 예측 불가능함을 보여 준다. 불규칙한 웨이트와 흐르는 듯한 형태는 머리카락의 자연스러운 움직임을 담는다.

같은 ‘A’인데 셋의 물성이 전부 다르다. 어떤 물질을 통과했는가에 따라 글자의 성격이 갈린다. 자연, 산업, 신체. 결국 물질이 형태를 결정한다는 것을, 세 개의 ‘A’가 나란히 증명한다.

그 밖의 사례들 — 물질이 문자로 건너가는 여러 경로

같은 계보 위에 놓을 수 있는 작업이 몇 더 있다.

오틀 아이셔(Otl Aicher, 1922–1991), 《Allgäuer Sommer》. 포스터는 1970년대 추정, 서체 원도는 1958년. 헬베티카(1957)로 대표되는 스위스 스타일의 기능주의가 주류를 이루던 시기에, 아이셔는 지역성과 기능성을 결합하는 독창적 길을 택했다. 알가우 지역 여름 축제의 악기들 — 테너 호른, 프렌치 호른, 트럼펫 — 의 형태를 그래픽 모티프로 끌어왔다. 금관악기의 원통형 관체, 나팔처럼 벌어진 벨, 밸브의 기하학적 배치가 포스터의 주요 비주얼이 되었다. 단순한 일러스트가 아니라 악기의 기능적 구조를 그래픽 시스템으로 옮긴 것이다. 1958년 원도의 둥근 터미널과 곡선 스트로크에도 관악기의 곡률이 배어 있다.

조셉 처치워드(Joseph Churchward, 1932–2013), 《Maori Typefaces》. 1980–2000년대. 개인용 컴퓨터와 폰토그래퍼 같은 소프트웨어가 폰트 제작을 민주화하던 시기다. 처치워드는 자연물에서 길어 올린 형태 언어를 서체에 적용했다. 뉴질랜드 고유 양치식물의 새순이 말린 모양에서 온 마오리 전통 문양 코루(Koru), 그 나선형이 레터폼의 골격에 스며든다. 장식으로 얹힌 게 아니라 글자의 뼈대 자체가 자연의 성장 패턴을 따른다.

이정명(Jungmyung Lee, Jung Lee Type Foundry), 《Spooky Hairy》(2017). 신체의 물질인 머리카락을 모티프로 삼았다. 비선형적 곡률, 예측 불가능한 방향, 중력과 바람에 의한 동적 변형. 머리카락의 형태적 특성이 글자에 그대로 옮겨졌다. 규칙적 그리드를 벗어나 유기적으로 변형되고, 스트로크의 웨이트가 불규칙하게 흔들린다. 텍스트 전체에서 머리카락이 공기 중에 그리는 움직임 같은 리듬이 인다.

라딤 페슈코(Radim Pesko, 1976년생), 《Paabo》(2020). 볼 스포츠의 물리적 특성을 가져왔다. 구체의 완결성, 표면의 연속성, 탄성에 의한 변형과 복원. 둥근 코너와 부풀어 오른 듯한 볼륨이 공의 물성을 시각화한다. 카운터 스페이스에서는 구체 내부의 공허함과 외부 표면의 긴장이 동시에 느껴진다. 정적인 문자에 운동에너지를 불어넣는 방식이다.

볼드 디시전(Bold Decisions — Mads Wildgaard & Asger Behncke Jacobsen), 《Clip》(2017). 사무용 클립의 기능을 번역했다. 클립의 핵심인 ‘고정’과 ‘압착’이 글자의 구조로 옮겨진다. 스트로크가 만나는 접합부의 강한 결속, 서로를 지지하는 요소들의 안정감. 금속의 탄성과 압력에 의한 변형이 시각적 텐션으로 구현된다. 기능적 오브젝트의 역학이 곧 타이포그래피의 구조 논리가 된다.

이들을 한 줄에 세워 놓고 보면, 물질이 문자로 건너가는 경로가 저마다 다르다는 게 보인다. 어떤 이는 물건을 줍고, 어떤 이는 손으로 그리고, 어떤 이는 대형으로 배치한다. 실물을 쓰기도, 기억을 재현하기도 한다. 그러나 목적지는 하나다. 물질의 고유한 속성을 문자의 언어로 옮기는 것.

2부. 타이포페이스 ‘Grip’

타이포페이스 Grip 워드마크
타이포페이스 Grip.

하나의 물건에서 시작된 서체

Grafisch Arnhem 학교 건물 내부
그라피시 아른헴(Grafisch Arnhem) — 학부 시절을 보낸 학교.

이제 내가 직접 그린 서체 ‘Grip’ 이야기를 하려 한다. 이 서체에는 조금 개인적이고, 조금 이상한 배경이 있다.

2016년, 나는 네덜란드 아른헴의 Grafisch Arnhem(그라피시 아른헴)에서 그래픽 디자인 학사를 하게 되었다. 첫해에는 모든 게 낯설었다. 네덜란드의 부동산 시스템에 대해 아는 게 전혀 없던 나는 학교가 소개해 준 호텔식 기숙사에서 1년을 지냈다. 1학기를 보내고 동기들의 집에 놀러 다니면서 뒤늦게 알게 됐다. 내가 너무 비싼 곳에 살고 있었다는 것을. 2학년으로 넘어가기 전 여름, Velperpoort역 근처로 이사를 결정했다. 학교와 시내에서는 조금 멀었지만 자전거로 15분이면 닿는 거리였고, 집도 마음에 들었다. 대신 동네 분위기나 이웃은 제대로 확인하지 못했다.

예상하지 못한 환경

아른헴 Velperpoort역 일대
아른헴 Velperpoort역 일대.

이사를 하고 나서야 알았다. 그 동네가 아른헴의 게토 중 하나였다는 사실을. 새로 이사한 집 바로 옆에는 지역 갱들이 살고 있었다. 수업이 일찍 끝나는 날이나 주말에 외출했다가 돌아올 때면 불쾌한 시비에 얽히기도 했고, 옆집의 시끄러운 음악을 고스란히 들어야 했다.

그래도 나는 물러설 생각이 없었다. 의지의 한국인으로서, 학교에 몇 안 되는 아시아인으로서, 여기서 질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때부터 나를 지키기 위한 준비를 시작했다. 왜소한 체구를 보완하려 무술을 배웠고, 은색 목걸이 체인을 걸었고, 휴대용 너클(knuckle)을 가지고 다녔다. 송강호가 나오는 느와르 영화를 보며 스스로에게 암시를 걸기도 했다. 지금 돌아보면 웃음이 나는 대목이지만, 당시의 나에게는 꽤 진지한 생존의 문제였다.

너클, 그리고 네 개의 손가락

모티프가 된 너클과 느와르 영화 스틸
모티프가 된 너클, 그리고 자기 암시가 되어 준 느와르 영화들. 2017년 6월.

2017년 6월 중순이었다. 2학기 마지막 과제로 서체를 개발해야 했는데, 마침 그때 손에 쥐고 다니던 너클이 눈에 들어왔다. 이걸 모티프로 서체를 만들면 어떨까. 그 생각이 들자마자 튜터에게 이메일을 보냈다. ‘Typeface Grip’은 그렇게 시작됐다. 형태에 대한 순수한 흥미에서 출발한 게 아니라, 내가 처한 환경과 거기에 대응하던 방식이 그대로 디자인으로 옮겨진 것이다.

첫 단계는 기본적인 타이포그래피 구조를 이해하는 일이었다. 베이스라인, 캡 하이트 같은 가로 기준선을 바탕으로 볼드한 서체의 초안을 그렸다. 처음에는 전통적인 방법론을 따랐다. 그러나 곧 이 프로젝트가 단순한 시각 서체가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손에 낀 너클 도식
손에 끼워 실제로 사용 가능한 너클로 만들기 위해, 손의 해부학적 구조에 맞춰 마스터를 다시 설계했다.

가독성 말고도 지켜야 할 조건이 하나 더 있었기 때문이다. 이 조형을 나무판자로 CNC 커팅해서 실제로 손에 끼울 수 있는, 사용 가능한 너클로 만들어야 했다. 그러니 손의 해부학적 구조를 이해하고 거기에 맞춰 마스터를 다시 설계해야 했다. 타이포그래피가 시각적 형태에 그치지 않고, 사람의 신체와 직접 맞물리는 오브젝트가 되어야 하는 독특한 제약이었다.

네 손가락이 네 기준선에 대응
너클의 네 구멍과 영문 서체의 네 기준선(Ascender·X-height·Baseline·Descender)이 정확히 대응한 순간.

그러다 결정적인 순간이 왔다. 새로 그린 마스터 원도를 프린터로 급히 출력해, 네 개의 둥근 구멍에 손가락을 끼워 보는 테스트를 했다. 구멍에 걸린 네 개의 손가락이 마치 네 개의 선처럼 보였다. 그 순간 알아차렸다. 이 네 개의 선이 영문 서체의 네 기준선 — 어센더, 엑스하이트, 베이스라인, 디센더 — 과 정확히 대응한다는 것을. 인체의 구조와 타이포그래피의 구조가 우연히 포개지는 순간이었다. 물건이 글자가 되는 지점을, 나는 내 손가락 위에서 봤다.

시스템을 짓다

Grip 스페시멘 Bacdf
Grip 스페시멘 — ‘Bacdf’.
대문자 마스터 다이어그램
대문자 마스터의 조형과 비례 (Top·Center·Bottom, 폭 470 / 어드밴스 500).

이 인사이트를 뼈대로 삼아 대문자용 마스터를 만들었다. 네 개의 구멍이 있는 기본 형태 하나가 대부분의 대문자를 만들어 내는 모듈러 시스템이 될 수 있었다. 전통적인 서체 디자인과는 완전히 다른 접근이었다.

제작 방식도 남달랐다. ‘A’는 아래쪽 링을 끊어 두 다리를 만들었다. 링 하나, 즉 카운터 하나를 남기니 ‘A’가 됐다. 빼기와 더하기의 논리가 아니라, 구조적 변형으로 글자를 낳는 방식이다. 모노스페이스 서체였던 탓에 ‘M’처럼 원래 폭이 넓은 글자에서는 고민이 있었지만, 다리를 세 개로 늘려 해결했다. ‘W’는 ‘M’을 위아래로 뒤집었다. 모노스페이스라는 제약이 오히려 창의적인 해법을 끌어냈다. 물론 예외도 있었다. ‘Z’는 기본 시스템으로 풀리지 않아 따로 접근해야 했다. 모든 시스템에는 예외가 있고, 그 예외를 어떻게 다루느냐가 시스템의 완성도를 결정한다.

소문자 마스터 다이어그램
소문자 마스터의 조형과 비례 (x-top·x-bottom, 폭 460 / 높이 520).

소문자는 조금씩 다른 접근이 필요했다. ‘a’는 소문자 마스터의 내부 링 두 개를 하나로 합쳐 완성했다. ‘b’는 처음에 대문자 ‘P’를 뒤집어 만들었는데, 그러면 대문자 ‘P’와 소문자 ‘p’의 구별이 사라졌다. 그래서 새 마스터로 ‘b, d, p, q’를 다시 그렸다. 시각적 유사성과 구별성 사이의 균형, 이것은 서체 디자인의 오랜 숙제다. ‘h, f, k’처럼 어센더가 있는 소문자는 세로 높이가 대문자와 같아 대문자 마스터를 그대로 썼다. ‘e, c, o, s’처럼 원형을 닮은 글자는 가장 바깥 아웃라인을 원형으로 한 새 마스터로, ‘i, j, g, v, w, x, z’처럼 폭이 좁은 글자는 기준 너비에서 200pt를 뺀 마스터로 파생시켰다. 같은 디자인 문법은 숫자와 기호로도 확장됐다. 서체의 완성도는 결국 알파벳을 넘어 숫자와 기호까지 하나의 시각 언어로 밀고 나갈 수 있느냐에 달려 있다.

가운데에서 흐르는 글

Grip에는 조판 방식에도 특이한 점이 있다. 이 서체는 베이스라인보다 가운데 글줄을 기준으로 작동한다. 한자나 한글이 가운데 점을 중심으로 놓이듯, Grip의 글은 중심선을 바탕으로 흐른다.

이는 한글의 중심선 개념을 서구의 서체 시스템에 접목한 실험이다. 동양적 사고를 라틴 알파벳 위에 얹은 셈이다. 그래서 텍스트 전체가 수평의 균형을 유지하며 흐르고, 거기서 특유의 리듬감이 생긴다. 서체의 출발이 손에 쥐는 물건이었으니, 그 조판이 몸의 감각을 닮은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다.

지금, 그리고 다시 물건으로

Grip 전체 글리프 구성
Grip 전체 글리프 구성 — 라틴 대소문자·숫자·문장부호·기호. 총 368자를 향해.

현재 Grip은 전체 368개 글리프 가운데 핵심 마스터 역할을 하는 요소들을 완성한 상태다. 라틴 알파벳 대소문자, 숫자, 기본 문장부호, 그리고 여러 기호가 들어 있다. 각 글리프는 너클이라는 기본 형태에서 파생된 일관된 문법을 따르면서도, 개별 문자의 기능적 특성을 반영한 고유한 조형을 지닌다. 지금도 글리프를 늘리고 완성도를 높이는 작업을 이어 가고 있다.

Grip을 적용한 의류와 굿즈
Grip을 적용한 의류 및 굿즈 — 디지털 파일이 다시 입을 수 있는 물건으로.

Grip을 활용한 기념품과 굿즈도 만들고 있다. 특히 티셔츠나 의류 같은 아이템을 통해, 서체가 디지털 파일을 넘어 실제로 입을 수 있는 물건으로 확장된다. 처음의 모티프가 손에 끼우는 너클이었으니, 디지털 타이포그래피가 다시 물리적 오브젝트로 돌아가는 셈이다. 물건에서 글자로, 글자에서 다시 물건으로. 이 순환이 나는 마음에 든다.

닫으며

물질과 타이포그래피의 관계는 단순한 형태의 차용을 넘어선다. 폴 엘리만의 도시적 잔재, 에드워드 펠라의 해체적 드로잉, 피오나 배너의 전쟁 기계, 그리고 내 개인적 경험에서 나온 Grip까지. 이들은 저마다 다른 방법으로 같은 일을 한다. 물질의 고유한 속성을 문자의 언어로 옮기는 일.

돌아보면 결국 글자는 처음부터 물건이었다. 점토판에 눌린 자국, 납으로 부은 활자, 손에 쥐는 너클. 우리가 매끄러운 화면 위에서 잠시 잊고 있었을 뿐이다. 앞으로도 타이포그래피와 오브젝트 사이의 새로운 가능성을 찾는 작업을 계속하려 한다. 물체가 글자가 되는 그 순간을, 나는 여전히 가장 좋아한다.